퇴사 후 한 달 — 내 시간으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
들어가며 — TL;DR
이전 직장을 떠난 지 한 달이 흘렀습니다. 한 챕터를 닫고 다음 챕터를 어떻게 열지 손에 잡히지 않은 채로 시작했지만, 돌이켜보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시도하고 만들어본 시간이었습니다. 묵혀두었던 개인 블로그를 다시 열었고, 손으로 직접 만드는 서비스 jjimhagi.com의 골격을 잡았고, 새로 합류할 에너지 도메인의 PoC를 짜봤고, 외부 컨설팅 협업을 처음으로 경험했고, 혼자 떠난 워케이션에서 "익숙한 자리의 집중력"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한 달이 알려준 한 줄은 이것이었습니다 — 회사 밖에서도 일은 만들어진다. 다만 그 일을 만드는 근육은 내가 키워야 한다.
2026년 4월 18일에 이전 직장을 떠나고, 새 회사에 정식 합류하기 전 약 한 달간(4/18 \~ 5/15)의 개인 회고입니다. "다음 직장 결정 → 합류 사이의 공백"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는 분들에게 작은 참고가 되길 바라며 정리했습니다.
한 달의 그림
먼저 한 달 동안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시도했는지 한 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각 줄기를 하나씩 풀어봅니다.
1. 개인 블로그 재정비 — "여기가 내 자리"
가장 먼저 한 일은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개인 블로그를 다시 여는 것이었습니다.
회사 안에 있을 때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곧 정체성을 채워주지만, 회사 밖에서는 그 정체성을 직접 만들어야 합니다. 글을 정기적으로 쓰는 습관까지는 아직 못 만들었지만, 적어도 "여기가 내 자리"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은 다시 마련해두었습니다.
- 외부에서 나를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닿는 곳이 필요했습니다.
- 컨설팅·협업 제안이 올 때,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일하는 사람인지"를 한 페이지로 전달할 매체가 필요했습니다.
- 무엇보다, 다음 일을 시작하기 전에 나 자신을 정리하는 의식(ritual)으로서 글쓰기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2. jjimhagi.com — 내 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번 한 달에서 가장 시간을 많이 쓴 것은 단연 jjimhagi.com이었습니다.
2.1 왜 직접 만드는가
회사 안에서 만드는 서비스는 "조직의 의사결정 위에 얹어진 결과물"입니다. 좋은 결과물이 나와도 그것이 온전히 내 손에서 시작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회사 안에서가 아니라 내 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 방향: 사람들이 일상에서 "공유하기"를 누를 때, 그 콘텐츠를 큐레이션하고 AI로 요약·정리해주는 서비스
- 레퍼런스: 비슷한 방향의
stashby를 알게 됨 → "이미 누가 하고 있다"가 아니라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신호로 해석
2.2 빠르게 한 사이클 돌리기
가장 신경 쓴 것은 "아이디어 → 배포 → 수익화 가능성 검증"의 사이클을 빠르게 한 바퀴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4월 말부터 coupang.jjimhagi.com을 첫 거점으로, 쿠팡 파트너스 연동까지 붙여서 끝단을 닫아봤습니다.
처음부터
jjimhagi.com 본체에 모든 기능을 넣으려 하면, 도메인의 정체성이 흐려지고 한 가지 가설을 명확하게 검증하기 어렵습니다. coupang.jjimhagi.com, game.jjimhagi.com 같은 서브도메인은 가설별로 분리된 실험장입니다. 성공한 서브도메인의 기능은 나중에 본체로 통합하고, 실패한 가설은 도메인째 닫으면 됩니다.
2.3 비 오는 날 잡힌 윤곽
5월 11~14일 여수 워케이션 중, 비 오는 날(5/12) 호텔 방 안에서 stashby 스타일의 AI 요약을 붙여보면서 서비스의 윤곽이 잡혔습니다. 다음 날(5/13) 오동도를 6km 걸으면서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은 이렇습니다.
| 축 | 가설 |
|---|---|
| 수익화 | shareby 컨셉 + 쿠팡파트너스 광고 결합 → 사용자가 공유할 때마다 자동으로 수익화 회로가 돌아간다 |
| 확장 | Flutter 앱으로 모바일까지 확장 → "공유하기" 액션은 PC보다 모바일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일어난다 |
| 차별화 | LLM 위키(개인 지식 베이스) 결합 → 큐레이션된 콘텐츠가 시간이 갈수록 사용자별 지식 자산으로 누적된다 |
장기적으로는 game.jjimhagi.com과 coupang.jjimhagi.com을 본체 jjimhagi.com으로 통합하는 방향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3. 새 도메인 온보딩 — 합류 전에 손으로 먼저
다음으로 시간을 들인 것은 새로 합류하게 될 에너지(태양광) 도메인의 온보딩 준비였습니다.
3.1 PoC를 먼저 짜본다
직장에 합류한 첫 주에 도메인을 공부하는 것과, 합류 전에 직접 PoC를 짜보고 들어가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4월 22일부터 26일 사이에 직접 작은 PoC(pathfinder-poc)를 한 사이클 돌려봤습니다.
3.2 얻은 도메인 감각
날씨 기반 발전량 예측 모델까지 손을 대보면서 한 가지가 분명해졌습니다.
태양광 발전은 데이터 · 물리 · 운영이 동시에 맞물리는 분야입니다.
- 데이터: 발전량, 일사량, 기상 데이터의 시계열 처리
- 물리: 패널 효율, 각도, 그림자 같은 도메인 지식
- 운영: 발전소별 이상 탐지와 유지보수
어느 하나만 잘해서는 풀리지 않는 멀티 레이어 문제입니다.
본격 합류 전에 손으로 먼저 코드를 쳐보고 들어간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회사가 던져주는 도메인을 받아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그 도메인을 손에 들고 회사에 들어간다는 자세 자체가 다음 챕터의 톤을 정한다고 봅니다.
4. 시니어로서의 컨설팅 — 첫 외부 협업
세 번째 줄기는 외부 컨설팅 협업의 첫 경험이었습니다.
4.1 타임라인
| 날짜 | 일 |
|---|---|
| 4/20 | 첫 미팅 (위워크) — 협업 가능성 탐색 |
| 4/22 | 기획서 검토, 슬랙으로 1차 피드백 전달 |
| 4/29 | 후속 미팅 — 협업 형태 구체화 |
| 5/8 | 강남 미팅 — 컨설팅 방향 정리 |
4.2 "조직 안의 시니어" vs "조직 밖의 시니어"
지난 10여 년 동안 "조직 안의 시니어"로 일해왔습니다. 직책과 권한, 그리고 함께 일하는 팀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자리였습니다. 이번이 처음으로 **"조직 밖에서 가치를 만드는 시니어"**로 일해보는 경험이었습니다.
조직 안에서는 "이 사람의 역할이 무엇인지"가 사전에 정의돼 있습니다. 조직 밖에서는 "내가 이 미팅에서 어떤 가치를 만들 수 있는지"를 매번 새로 증명해야 합니다. 이게 어색하고, 또 그래서 좋았습니다 — 군더더기 없이 가치만으로 평가받는 자리니까요.
아직은 어색하지만, 이게 앞으로 더 늘려가고 싶은 형태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5. 여수 워케이션 (5/11 ~ 5/14) — 환경 vs 익숙함
네 번째 줄기는 처음 시도해본 혼자 여행 + 워케이션이었습니다.
5.1 무엇을 했나
- 광명역 2시 28분 KTX → 여수 베네치아 호텔 3박
- 비 오는 날엔 호텔 안에서 작업, 맑은 날엔 오동도 6km 도보
- 목표: "서비스 하나 더 진전시키기" →
jjimhagi.com의 AI 요약 PoC 완성
5.2 환경을 바꾸면 정말 더 몰입될까
솔직히 말하면, 워케이션의 효율은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습니다. 환경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몰입이 따라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익숙한 자리·익숙한 카페가 주는 집중력의 무게가 생각보다 큽니다. 환경의 새로움은 처음 한두 시간만 작동하고, 그 뒤로는 오히려 "어디서 작업할지 정하는 비용"이 집중력을 깎습니다.
5.3 그래도 남긴 것
그래도 한 가지는 명확하게 남겼습니다. "서비스를 하나 만들어보자"라는 목표를 들고 갔기 때문에, jjimhagi.com의 AI 요약 아이디어를 한 단계 진전시켰습니다. 목표 없이 떠난 워케이션은 그냥 여행이고, 목표를 가진 워케이션은 거리감을 얻은 작업장이라는 차이가 컸습니다.
5.4 은퇴 준비라는 관점
조금 다른 각도로 보면, 혼자 여행과 워케이션을 잘하는 능력은 장기적인 은퇴 준비의 핵심 근육 중 하나입니다.
은퇴 후에 갑자기 "혼자 잘 지내는 법"을 익히기는 어렵습니다. 동료·일정·미팅이 자동으로 채워주던 시간이 사라졌을 때, 스스로 자기 시간을 채울 수 있는 사람만 그 시기를 잘 보냅니다. 워케이션은 그 근육을 미리 키워보는 작은 실험장입니다.
지금은 서툴지만, 그래서 더 연습해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6. 그 외 — 일상의 회복
한 달 동안 일만 한 건 아닙니다. 회사 안에 있을 때는 미뤄두기 쉬웠던 일상의 결을 회복하는 것도 이번 한 달의 큰 줄기였습니다.
- 몸 쓰기: 관악산 혼자 등산(5/4), 모락산 등산(4/22), 의왕 책마루 도서관 작업(5/6)
- 사람: 이전 직장 동료 회식(4/28), 오랜 옛 동료들과의 만남
- 미뤄둔 정리: 안경 두 개 새로 맞추기(4/29), 치과 신경치료 마무리(4/21)
"치과 가기", "안경 맞추기" 같은 일은 늘 다음 주로 미뤄도 큰 문제가 안 생깁니다. 그래서 1년, 2년이 그냥 갑니다. 회사 밖에서 한 달을 보내고서야 깨달은 건, 이런 작은 것들이 쌓여 컨디션의 바닥을 결정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7. 한 달 회고 — 만든 것 / 얻은 것 / 확인한 것
한 달을 세 줄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 분류 | 내용 |
|---|---|
| 만든 것 | jjimhagi.com 서비스 골격 · pathfinder-poc · 블로그 재정비 |
| 얻은 것 | 새 도메인의 사전 감각 · 외부 협업 경험 · 시니어 컨설팅의 첫 경험 |
| 확인한 것 | 혼자 여행과 워케이션은 아직 서툴다 — 그래서 더 연습해야 한다 |
7.1 가장 중요한 한 줄
퇴사 직후의 두려움보다, "내 시간으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를 다시 묻게 된 한 달이었습니다.
회사 밖에서도 일은 만들어집니다. 다만 그 일을 만드는 근육은 내가 키워야 합니다. 환경이 일을 만들어주던 시기와, 내가 일을 만들어내야 하는 시기는 같은 사람이라도 전혀 다른 근육을 씁니다. 다음 챕터에 들어가더라도, 이번 한 달에 키운 그 근육은 잃지 않으려 합니다.
7.2 다음 한 달의 질문
다음 한 달은 새 회사 합류와 함께 시작됩니다. 그 안에서 스스로에게 던질 질문은 세 가지로 잡아봅니다.
jjimhagi.com의 한 가설을 끝까지 검증할 수 있는가 — 트래픽 또는 매출, 어느 한 축의 실제 신호를 확인.- 새 도메인에서 첫 90일 안에 "쓸모"를 증명할 수 있는가 — 내가 가진 카드(아키텍처·AI·운영)를 도메인 문제에 어떻게 끼워 맞출지.
- 혼자 시간을 채우는 근육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 회사에 들어간 첫 달부터 일상이 자동으로 다 채워질 텐데, 그 안에서도 "내 시간"의 비중을 어떻게 지킬지.
한 달이 짧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다음 한 달이 더 기대됩니다.